우리집의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꽃병에는 앙상한 나뭇가지 하나가 1년 넘게 꽂혀 있다. 작년 3월, 지인의 결혼식에서 얻어온 꽃다발에 있던 이름 모를 나뭇가지가 1년이 넘도록 살아있다고 하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
처음 꽃다발을 받아와서는 오래 두고 보려고 꽃병에 꽂아 두었다. 꽃은 며칠 뒤에 시들어 버렸는데 아직 초록이 무성한 나뭇가지는 버리기 아까워서 그대로 두었다. 초록색 잎이 예뻐서 다 떨어질 때까지는 물 갈아주며 보아야지 싶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잎사귀 몇 개로 6개월을 버티더니 결국 물속 가지 밑동에 정말 작고 가늘고 하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파랗게 남아있던 초록 잎들은 뾰족이 돋아난 뿌리에서 양분을 빨아들이며 살아남았나 보다. 그러면서 마른 나뭇가지를 뚫고 참깨같이 작은 몽울들이 오종종히 맺혀 있다가 몇 개월을 버티면서 어느 날 갑자기 잎으로 툭 하고 피어올랐다. 초록 잎 하나가 돋아 나오는 일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이 나뭇가지를 일 년 동안 지켜보며 나는 그 일을 위해 나무가 얼마나 오래도록 앓고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지를 알았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인사동 <꽃밥에피다>의 입구에는 작은 텃밭이 있다. 봄이면 몇 가지 야생화와 풀꽃들을 구해다 심고는 일 년 내내 아침저녁으로 돌보고 있다. 올해 심은 꽃들은 매발톱, 백리향, 넝쿨장구리, 금낭화, 벌개미취, 달맞이꽃 등등. 꽃밥의 텃밭은 늘 다양한 야생화들로 화사하다. 이 텃밭에서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저기 꽃들이 만발하는데 한련화 한 그루가 영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잎만 무성하였다. 오랫동안 끙끙거리며 앓는 모습이라 꽃을 보기는 어렵겠다고 포기한 상태였다.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잎만 무성하던 한련화가 각성한 듯이 수십 개의 꽃망울을 매일 쏟아내듯 뿜어내더라니. 캐내려 했던 결심이 미안하여 가슴 철렁하던 그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학교 다니며 읽었던 청년심리학 책에서 무척 공감하며 읽었던 내용이 있다. 인간은 내면이 성장하고 깊어지기 위해 온갖 갈등이 휘몰아치는 청년의 시기를 지나는데 이를 질풍노도의 시기, 모라토리엄의 시기라고 한단다. 그런데 이 모라토리엄은 누구나 똑같은 시기와 똑같은 기간으로 지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 기간이 짧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주 길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 질풍노도의 시기가 시작되기까지 무려 4~50년이 걸리기도 한다지.
그 책을 읽은 이후로 나는 살아오며 종종 생각한다. ‘나는 아직 모라토리엄인가’, 누군가를 지켜보면서도 생각하곤 했다. ‘그는/그녀는 어쩌면 아직 질풍노도인가?’ 사람에게도 식물에도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모라토리엄의 시기가 있다고 생각하면 기다림이 덜 지루할 수 있을까. 몇 개월 동안 애를 써서 작은 초록 잎을 기어이 틔우고야 마는 나뭇가지를 보며 다시 한번 떠올린다. 누구도 감히 섣불리 판단하지 말 것! 그리고 뭐 하나 바로 시작하기 쉽지 않은 나 자신에게도 다시 되뇐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봐!
네니아 웹 매거진
2025년 6월 10일